[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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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사신문 김은아 칼럼니스트] 커피 포트가 보글거리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글을 쓰다가 막혔고 커피로 답답한 속을 달래려던 참이었다. 이럴 때 구미를 당기는 건 수동 그라인더로 감성을 곱게 갈아 넣은 원두커피도, 모던한 캡슐 커피도 아니고, 인스턴트커피였다. 쌉쌀하면서도 달달하게 혀의 미뢰를 마구 두드리는 맛. 그 강한 자극이 무미한 삶에 위로가 된다고 할까?

그러다 멈칫했다. ‘새벽에도, 아침에도 마셨는데 또 마셔?’ 식후 세 번 약 먹듯 마시는 즉석커피는 음미하는 게 아니라 삼키는 것에 가까웠다. ‘커피에 길들여진 건가? 중독인가?’ 의문이 일었다. 혹자는 마시는 음료가 뭐 그리 대수인가 싶겠지만, ‘부어라 마셔라’ 하는 시기를 거쳐 인생의 얼개가 어느 정도 짜인 마흔이 되자 ‘축적’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간 마신 인스턴트커피가 나에게 미쳤을 영향을 구체적으로 가늠하고 싶었다. 하루에 최소 두 잔은 마셨으니 일 년에 칠백삼십 잔을 마신 것이고, 이십 년을 그리 살았으니 만 사천육백 잔을 들이킨 셈이다. 오랜 세월의 흡수와 흡착의 과정을 거쳐 내 안은 여러 번 사용한 빨대처럼 커피로 얼룩지고 물들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밤이 되자 마감을 위해 어김없이 인스턴트커피를 홀짝거렸다. 스르르 내려오는 눈까풀을 들어 올릴 만큼의 각성 효과가 사라지자, 미세먼지처럼 일상을 슬금슬금 잠식하는 ‘중독’의 실체를 마주했다. 조치가 필요했고 즉석커피 대신 차를 마셨지만 밍밍할 뿐이었다. 달짝지근한 커피에 길들여진 내 혀는 티백 속에서 우러나는 허브의 은은한 맛을 좀처럼 음미할 수 없었다.

입맛이 짧아졌다 것. 강한 자극에 길들여졌다는 건 단지 미각의 차원이 아니었다. 삶 전면에 대한 감각이 둔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강렬한 사운드에 빠져들다 보면, 그것이 일상이 되면 멀리서 순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의 지저귐,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땅을 두드리는 비의 소리. 삶에 충만감을 더하는 잔잔한 소리들은 사라져갔다.

얼마 전에는 작은 모임에 참여했다. 유쾌한 농담은 엔도르핀을 돌게 하지만 폭소가 불꽃처럼 발화하는 순간이 관계의 전부였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거나, 이따금 상대의 얼굴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을 들여다볼 만큼은 아니고.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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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봤어요?” 하는 누군가의 질문에 안 봤다고 하자 “그 재밌는 걸 왜?” 하는 물음이 되돌아왔고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머쓱한 웃음만 지었다. 서바이벌 게임의 빨려 드는 몰입감에는 거침없이 사살된 패자의 붉은 피도 묻어 있을 것이었다. 시뻘겋게 일었다가 소멸한 자극이 관객에게 남긴 건 무엇이었을까? ‘살아있음’에 대한 경이감일까? 난폭성에 무디어지는 감각일까?

새해 들어 하루 한 번은 인스턴트커피 대신 다양한 차를 입에 대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어제는 유자차, 오늘은 동백차를 마셨다. 낯선 맛이 입안에 감돌다가 목구멍으로 순하게 넘어갈 때 즈음, 잔잔한 꽃 향이 퍼졌다. 차의 맛. 식물의 생장처럼 느리고 길게 다가오는 맛. 그 뜨끈한 것이 내 안에 천천히 흘러 들어올 때, 겨울의 땅처럼 웅크린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칼럼니스트 프로필

동국대학교에서 영어 영문학을, 영국 위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플로리스트학을 전공했다. 인생에는 정해진 답이 없고 스스로 묻고 물어 맞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감성적 모험주의자이다.

문학과 꽃을 이용한 힐링 강의를 하며, 한경대학교 신문사 주최, 한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요즘 세대의 마음을 담은 꽃말 에세이 <모든 순간에 꽃은 피듯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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